평생학습 파트너, 휴넷: "연봉 1달러의 리더십, 리 아이아코카연봉 1달러의 리더십, 리 아이아코카"
“지난 달에는 무슨 걱정을 했었지? 작년에는? 그것 봐라. 기억조차 못하고 있잖니. 그러니까 오늘 네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닌 거야. 잊어버려라. 내일을 향해 사는 거야.”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해고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첫 출근한 회사에서 35억 달러의 적자, 부패한 간부들, 그리고 고질적인 사내분규와 맞닥뜨린다면?
성실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한 꼬마아이
아메리카 드림을 품고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니콜라 아이아코카와 앙투와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리 아이아코카의 본명은 리도 안소니 아이아코카이다. 아버지 니콜라는 리 아이아코카의 평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인답게 가족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자동차에 열광하는 포드 마니아였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리(lee)는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자동차를 경험하게 된다.
“지난 달에는 무슨 걱정을 했지? 작년에 한 걱정은? 거 봐, 기억 안 나지? 당장은 큰일이라도 난 것 같겠지만,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닌 거야. 우리 잊어버리자. 내일을 향해 달리는 거야.”
힘든 시기에 낙관주의자가 되는 아버지 니콜라 덕분에 리 또한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낸다. 포드에서 해고 되었을 때도, 파산한 크라이슬러를 회생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에도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밝은 내일을 다짐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6학년 때, 아이아코카가 선도부장이 될 것을 못마땅해하던 급우들의 조작으로 학급 선도부 선거에서 패한 사건이 있었다. 선생님마저 아이아코카에게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종용했다. 이탈리아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인종차별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꿈에 그리던 포드에서 황금 시대의 정점에 서다
어렸을 때부터 포드를 꿈꾸던 아이아코카는 프린스턴 대학교 공학석사 학위를 받고 포드로 간다. 공대생이었지만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던 리는 세일즈맨으로서 포드에 첫 발을 디딘다. 아이아코카는 타고난 세일즈맨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동차 딜러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세일즈 스킬을 터득하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흔히들, 아이아코카가 포드에 입사하기 위해 ‘리도’에서 ‘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포드에 입사한 후 세일즈를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포드에서의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는 미국 자동차 시장에 처음으로 자동차 할부제를 도입한다. 이를 통해 실적이 저조하던 포드사는 7만 5,000대 가량의 차를 더 판매할 수 있었다. 소비자가 원하는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머스탱을 탄생시켜 ‘머스탱의 아버지’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포드가 머스탱과 함께 황금시대를 맞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아코카는 훌륭한 경영자의 자질을 결단력이라고 말한다. 경영자는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100퍼센트 모으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직감에 근거해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결단력은 크라이슬러로 옮겨 대량 해고를 감행할 때, 35명의 임원진 중 33명을 해고할 때에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했다. 순간의 이익 때문에 등을 돌리는 일이 없었고, 항상 진실되게 행동했다. 필요할 때에는 날카로운 충고나 비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이런 진심은 크라이슬러에서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 포드사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크라이슬러에 충성을 맹세한 것은 아이아코카의 진심 어린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아이아코카는 분기별 평가제도를 선호했다. 3개월마다 각 사원이 직속상관과 함께 지난 분기 동안의 성취 사항을 평가하고 다음 분기의 목표를 구상하는 것이다. 목표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일치하면 사원은 서면으로 목표를 작성하고 상사는 서류에 결제를 한다. 이 방법을 통해 아이아코카는 상사와 부하의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고자 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자기자신의 목표라는 자발적인 동기를 갖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승진가도를 달리던 아이아코카는 한 순간 추락한다. 추락하기 전 그는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연봉 97만 달러의 포드의 최고경영자였다. 하지만 독재자 헨리 포드의 사사로운 질투심은 그를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한다. 헨리 포드는 끝까지 해고의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자신보다 더 유명한 아이아코카에게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아이아코카는 32년 동안 평생을 몸바쳐 이룩한 포드 왕국에서 이유도 모른 채 쫓겨 나고 말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크라이슬러를 일으켜 세우다
포드에서 쫓겨난 후 4개월 만에 크라이슬러에 취임한 아이아코카가 앞날에 닥칠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크라이슬러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크라이슬러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출근 첫 날, 그를 기다린 것은 35억 달러의 적자, 창고가 꽉 찰 정도로 누적된 재고, 이미 경영의지를 상실한 부패 간부들과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직원들이었다. 특히 소비자들은 더 이상 크라이슬러를 눈 여겨 보지 않았다. 크라이슬러는 한물간 자동차, 나이든 사람들만 타는 자동차라는 것이 소비자들의 인식에 박혀 버린 것이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크라이슬러를 살리기 위해 냉혹한 방법을 택한다. 계열기업 중 부실한 21개를 정리하고, 35명의 간부들 중에서 33명을 해고한다. 뿐만 아니라 18만 명의 종업원 중 5만 명을 구조조정하고 남은 종업원들의 연봉도 5% 삭감한다. 그리고 아이아코카 자신은 연봉 1달러만 받겠다고 선언하고, TV 광고에도 출연해 대국민 호소도 한다. 그의 행동은 크라이슬러 직원들을 하나의 가족 같은 집단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이 크라이슬러를 응원하도록 만들었다.
정부와 은행을 설득해 정부보증 대출금을 받아낸 아이아코카는 K-모델을 통해 회사 살리기에 나선다. 연료 효율이 좋고, 안락하고 멋있는 K-car는 1981년 ‘올해의 차’로 선정되면서, 첫 해에만 50만 대가 팔리는 큰 히트를 기록한다. 아이아코카는 직접 TV 광고에 출연해, “이보다 좋은 자동차를 찾으실 수 있다면, 그 차를 사십시오.”라는 말을 하여 소비자들을 움직인다. 광고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1차 석유파동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크라이슬러는 기록적인 흑자를 낸다. 그에 힘입어 1983년 9월에는 상환 기간이 7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정부 융자금 8억 1,34만 7,500달러를 일시에 갚는다. 융자금을 갚고도 크라이슬러는 7억 달러의 순이익을 남기는 엄청난 성과를 일구었다. 크라이슬러의 모든 것이 안전궤도에 들어서자 아이아코카는 5년 전에 정리 해고한 근로자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삭감했던 5%의 연봉도 원래 수준으로 돌려놓았다.
전설적인 경영자로 영원히 기억되다
포드에서 쫓겨난 후 크라이슬러에 영입된 것을 아이아코카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이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라이팬에서 불 속으로 뛰어든 격이었네, 크라이슬러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엄청난 연봉을 제시했어도 가지 않았을 거네.” 하지만 그는 포드에서 크라이슬러로 옮긴 덕분에 전설적인 경영자로 기억될 수 있었다. 명석한 두뇌, 솔직한 어법, 함께 희생을 치르겠다는 정신, 상식과 창조적인 생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 그는, 앞으로 수백만의 젊은 경영자들의 표본이 될 것이다.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자유의 여신상이라면,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경영자들에게는 단호하고 도전적인 리 아이아코카라는 상징이 있다. 그의 전설은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아코카가 주는 리더십의 지혜
대인관계연구의 대가인 Robbins 박사는 대중들에게 카리스마를 보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했는데, 그 중 2가지가 아이아코카의 리더십을 잘 설명한다. 첫째로, 상대방에게 항상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어디 한 번 두고 보라구, 다 잘 될테니까” 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정적인 이야기나 소식을 전하는 사람보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을 심리적으로 더 선호하며 정신적으로 의지한다. 설사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긍정적인 대답을 듣기 원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카리스마적 분위기 조성에 결코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다. 대화를 나눌 때, 단순히 언어만을 사용하기 보다는 강렬한 눈빛과 적절한 제스처 등을 구사하는 것으로도 그러한 분위기를 가질 수 있다.
카리스마는 사람을 끄는 일종의 매력이다. 카리스마라는 뜻이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거나 또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같이, 신이 부여한 영적인 재능이듯,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신비한 매력이다. 아이아코카는 이 매력,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 매력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먼저, 아버지에게서 받은 낙천적인 성격이 좌절감에 빠져있던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케 하였다. 그리고, 포드사에서 해고당하고 4개월만에 크라이슬러에 합류한 그의 배경, TV광고에 출연하거나, 연봉 1달러만 받겠다고 공식선언하는 등의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 탁월했다.
그러나,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모든 시대와 모든 상황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수준이 매우 높고 환경의 불확실성이 만연된 경우라면,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가장 중요한 리더십중의 하나가 된다. 1930년대 대공황때 보여준 루즈벨트 대통령의 리더십, 그리고 1970년대 아이아코카의 리더십이 바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다. 반면 1990년대 후반 GM의 실패는 당시 사장(John Smith Jr.)의 카리스마 부족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아이아코카는 카리스마 리더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한 리더의 반열에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대한 리더십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전체적인 리더십 측면에서는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아이아코카의 네임 밸류는 그의 리더십 역량이 아닌 경영 능력에 좀 더 포커싱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카리스마 리더십의 측면에서는 분명 배울 점이 있다. 아이아코카가 주는 카리스마 리더십의 교훈을 가슴에 담고, 그런 상황이 필요해질 때, 멋진 무기로 활용할 수 있으면 그만 아닌가.